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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발레 - 대한민국 대표로 하는 국립발레단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입니다.

백조의호수 Swan Lake

백조의호수 포스터이미지
원작
무대
의상
사이몬 바리살라즈 (Simon Virsaladze)
조명
미하일 서칼로프(Mihail Sokolov)
소요시간
2시간 5분
공연년도
2001년, 2003년, 2005년
[초연] 1877년 2월 20일, 많은 사람들이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아직 젊지만 이미 유명해진 한 작곡가의 첫 발레 음악이 선보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표트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호수]. 작가이자 볼쇼이극장의 레퍼토리 디렉터인 베기체프와 발레마스터였던 겔체르가 공동으로 대본을 맡고 있었으니 기대할만 했다. 그러나 안무는 그저 평범한 안무력을 갖고 있던 벤젤 레이징거(wenzel reisinger)가 맡고 있었다.

오데트를 맡은 주역무용수는 안나 소베슈찬스카야(anna sobeshchanskaya)였는데 이 공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1880년 벨기에 안무가 조셉 한센의 안무로 볼쇼이에서 공연했지만 이것은 초연보다 더 참담한 실패였다. 볼쇼이발레단이 의욕적으로 준비한 이 작품이 실패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주역무용수인 소베슈찬스카야는 전성기를 지난 발레리나였고, 의상이나 장치도 빈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차이코프스키를 실망시킨 것은 ‘이것이 무슨 발레음악이냐?’는 비평가들의 평가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 무용수의 곡선미나 우아한 포즈를 살리는 단순한 무곡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에게 이 음악이 갖고 있는 교향악적인 풍요로움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안무가 레이징거 조차 이 음악의 극적인 아름다움을 발레로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당시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1877년 2월 20일, 이 날은 발레사에 매우 중요한 날이 되었다. 발레는 교향곡이다(ballet is also a symphony).’라고 후에 차이코프스키가 말하고 있듯이 그전까지 단순히 반주음악으로 낮게 평가되던 발레 음악이 [백조의호수]를 기점으로 음악적인 요소들은 물론이고 발레의 내용까지 완벽하게 담고 있는 한 편의 교향곡으로 격상했기 때문이다. 사실 차이코프스키는 볼쇼이극장으로부터 신작 발레의 작곡을 의뢰받기 4년 전(1871년)에 이미 누이가 살고 있는 바바리아 지방의 카멘카(kamenka)에서 조카들을 위해 독일 작가 무제우스의 동화를 바탕으로 백조들의 호수를 작곡하고 있었다. 이 소품의 내용은 3막 궁중무도회 장면과 비슷한데 차이코프스키의 이 구상을 뼈대로 해서 볼쇼이극장의 베기체프와 겔체르가 전4막의 대규모 로맨틱 발레로 발전시켰다고 전해진다. 차이코프스키는 3막에서 몇곡을 차용해 2막을 2주만에 완성하고 1876년 4월20일에 49곡 전곡을 탈고했다.

그에게 작곡의 영감을 준 것은 동화 이외에 또 있었다. 카멘카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백조들이 살고 있는 호수와 노이슈반슈타인(neuschanstein)이란 이름의 ‘백조성’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매우 고상하고 예술적 안목이 높았던 루드윅 2세(ludwig ll)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백조를 만들어서 자신의 왕가와 삶의 상징으로 삼았고, 이 낭만적인 왕이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리 멀지 않는 호수에 빠져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불행한 왕의 운명이 가슴에 와닿아서 발레 [백조의호수]의 모든 주인공(오데트, 지그프리트, 로트바르트)을 죽는 것으로 작곡했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그후에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인형] 같은 주옥 같은 발레 음악을 작곡했지만, 모두 초연에 실패하므로써 살아생전에 자신의 발레 음악이 빛을 보는 것도 보지 못하고 1893년에 죽고만다.

[걸작의 탄생]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진가를 알아 본 이는 상트 페테르부르그 마린스키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있던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였다. 프티파는 차이코프스키가 죽은 뒤 볼쇼이 극장에서 이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총보를 검토한 뒤 음악과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임을 발견하고 마린스키 극장장에게 이 발레를 차이코프스키 추도공연의 레퍼토리로 공연하도록 추진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막내동생인 모데스트가 대본의 일부를 수정하고 작곡가 드리고가 곡의 일부를 변경한데다 차이코프스키 만년의 피아노곡과 18개의 소품집에서 3곡을 선곡해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삽입했다. 당시 프티파의 조감독으로 있던 이바노프가 안무하여 2막만 추도공연으로 공연했는데 대호평을 얻었다. 이에 힘을 얻은 프티파는 다음해 1895년 1월 27일 [백조의호수] 전막을 무대에 올린다. 이 공연에서 프티파는 궁중의 파티 장면인 1막과 3막, 이바노프는 백조의 호숫가 장면인 2막과 4막을 안무했다. 오데트 역에 피에리나 레냐니, 왕자 역에 파벨 게르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원래 [백조의 호수] 음악에서 일부가 바뀌었으나 공연이 워낙 성공적이어서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프티파-이바노프 버전의 성공 요인은 안무의 뛰어남에서 찾을 수 있다.
일찍이 그랑 파드되(2인무)나 파티장면의 디베르티스망(줄거리에 관계없이 무용수의 기교를 보기 위한 춤의 향연)같은 고전발레 양식을 확립한 프티파는 [백조의 호수]에서 이런 고전발레의 특징을 잘 살려 춤이 빈틈이 없이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게 만들었다. 또한 이바노프가 안무한 호숫가 장면에서는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치는 호수, 백조와 인간의 사랑이라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잘 살려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낭만발레의 특징도 갖추고 있다.

특히 의상에 있어서 레이징거 초연 시는 긴 의상이었으나 프티파-이바노프 판에서는 짧은 튀튀(tutu·여성이 입는 발레의상)로 바뀌면서 정확하고 다양한 다리 동작을 강조, 백조의 신비함이 부드러운 팔 동작과 함께 유연하게 나타나도록 했다. 특히 백조가 깃털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목을 둥글게 돌리는 움직임, 접혀있는 날개처럼 양쪽으로 팔을 굽히는 동작, 날개 치는 듯한 가슴 , 날개 끝이 파르르 떨리는 섬세한 움직임, 다리의 물방울을 톡톡 털어 내는 모습 등 새의 동작에서 응용한 시적 표현이 압권이다. 아무튼 프티파-이바노프의 [백조의 호수]가 탄생된 후 100년 이상 여러 명의 안무가가 [백조의 호수]를 재 안무했지만 원본의 탁월함으로 인해 큰 틀은 바뀌지 않고 있었다. 특히 이바노프의 2막 호숫가 장면과 프티파가 안무한 3막 흑조 오딜과 왕자의 2인무는 발레사의 명장면으로 원형 그대로 공연되고 있다.

1964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볼쇼이발레단의 예술감독이 된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인 차이코프스키를 위해 <차이코프스키 발레>라는 이름으로 그가 작곡한 [잠자는 숲 속의 미녀][호두까기인형]등을 작곡가의 원래 의도에 맞게 재안무를 하여 성공을 거둔다. 1969년 그리가로비치가 재 안무한 [백조의 호수]는 그 동안 우리가 많이 봐왔던 러시아 키로프발레단이나 영국 로열발레단 등의 [백조의 호수]와 비교해 볼 때 내용이나 안무 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가장 큰 특징은 악마 로트바르트에 대한 해석이다. 다른 버전에서는 지그프리트 왕자와는 별개의 인물인 악한 마법사로서 표현되지만 그리가로비치 버전에서는 이 악마가 지그프리트 왕자의 또 다른 내면, 즉 악한근성이 라고 표현된다. 지그프리트 왕자와 백조 오데트는 우리들의 선한 면과 사랑을, 악마와 흑조 오딜은 악한 면과 운명을 상징하는데 이 상반된 성격들이 한 인간 속에 존재하여 상황에 따라 그 힘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리가로비치의 [백조의 호수]를 보는 관객들은 누가 나쁘고 좋고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둘 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성격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발레가 단순한 동화의 수준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삶의 철학을 나타내는 소설이기를 바랬던 그리가로비치의 [백조의 호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지는 안무가 그리가로비치와의 인터뷰를 통해 직접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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